혐오스러운 치과 과잉 진료와 그 체험

  경제학 용어로, '역선택'이라는 용어가 있다. '역선택'이란, 중고자 딜러나 치과의사 처럼 고객이나 내담자는 알기 힘든 전문적인 정보를 알고 있는 판매자 및 치료자와 같은 위치의 사람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전문지식을 이용하여, 그에 비해 정보와 지식이 결여되어 있을 일반 구매자들을 착취하고, 이용하는 현상을 가르키는 용어이며, 여기서 좀 더 나아가면 '도덕적 해이'와도 연결된다. 그리고,  굉장한 화두가 되었던 '과잉진료', 그것도 '치과의 과잉진료'는 완벽한 '역선택'과 '도덕적 해이'의 대표격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치아! 사람에겐 눈 다음으로(어쩌면) 중요하고, 돈이 많이 들어가는 신체 부위가 바로 이 '치아'일 것이다. 이처럼 중요한 인간의 생명과 같은 신체 부위를 대상으로 자동차 딜러만도 못한 양아치 짓을 하는 것 만큼 끔찍한 일이 과연 있을까? 있다. 많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치과 과잉진료' 이상은 아닐거다. 치아가 파절 됐단다. 파절? 현학적인 전문용어는 치우고, 그냥 치아가 깨졌다는 뜻이다.  나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었다. 치아가 깨질일이 있을까? 알고보니, 충치에 의해서도 치아가 깨질 수는 있단다. 그래, 그렇겠지. 그런데 분명 충치는 아니라고 한다. 그럼, 무조건 어떤 힘에 의한 깨짐일 수 밖엔 없다. 치아와 뼈는 같은 구성성분을 이루고 있으며, 아니, 치아가 뼈보다 더 단단하다. 이 뼈보다 단단한 치아가 깨질정도면, 도대체 얼마나 큰 힘이 작용되야 한다는걸까? 누군가는 딱딱한 음식을 먹으면 치아가 깨질 수도 있다는데, 맞다! 돌이나 쇠젓가락을 잘못 씹으면 치아는 분명 깨질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그런 기억이 없다. 복싱이나 격투기와 같은 치고 박는 운동을 하다보면 치아가 깨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평화 주의자지, 폭력을 쓸 일이 없다. 그럼, 역도나 파워리프팅 같은 걸 하다가 순간적인 힘을 쓰기...

어차피 죽을 건데 왜 사냐? 라고 하는 문제

 


현실에서 우리가 흔히 쓰는 말들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어차피 죽을건데, 그럼 뭣하러 사냐?"


나중에 다 하면 되는데, 지금부터 할 필요가 있냐~ 하는 게으른 소리에 항상 따라붙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 뭔가 위화감이 든다.


우리 삶의 최종 종착지가 결국 '죽음'이기 때문에, '그런 식이라면' 구태여 '왜 사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은 완벽하게 틀린 말과 개념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최종 종착지가 결국 '죽음'이라는 걸, 깨닫고, 인지하고 있어야. 사실은, '더 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결론이 '죽음'이기 때문에, 삶은 살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

결론이 '죽음'이기 때문에, 삶은 살 가치가 생겨나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고?

그래, 한번 생각해 보시라!


당신은 당신이 일주일 뒤에 죽는다는 걸 안다고 가정해보자.

그 일주일 동안 당신은 매일 같이 회사에 출근해서 상사에게 온갖 갑질이나 당하면서, 매일 매일을 그렇게 다람쥐 챗바퀴 물구나무서기로 서서 돌리듯 하루하루를 보낼 것인가?



당신이 어지간한 변태성욕자가 아닌 이상에야 절대로 그렇진 않을 것이다.



아마,

부모에게 못했던 말도 하고, 미뤄왔던 여행도 가고, 먹고 싶은 음식 다 먹고, 입고 싶은 옷 다 입으면서, 회사 상사에게 욕도 하고, 어쩌면 주먹을 갈길지도 모른다. 뭐 어떤가? 죽은 사람을 교도소에 보내기라고 할 건가? 


즉,

당신은 당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삶을 더 알차고, 더 가치있게 보내기 위해 최고, 최선의 노력을 할 것이다.


고로,

당신은 '자신이 죽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남은 시간을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게 보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게으름 사람에게 훈계 좀 해보겠다며, '죽을 건데 왜 사냐 그럼~?' 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오류가 된다.  

'자신이 언제 죽는 줄 깨달을수록 우리는 더 잘 살게 되기 때문이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나는 한그루에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도 보라.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니까 그제서야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괜히 오늘 자신이 죽는다면 '지금 이 일을 할 것인가?'라며 매일 아침부터 스스로에게 자문자답했던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아시겠는가?



고로,

죽을 건데 왜 살아~ 가 아니라, 죽기 때문에 열심히 산다!가 진짜로 맞는 말이라는 것을.



그런데, 이 블로그 글을 읽는 여러분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에 어리석은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미지에의 공포의 압도되어, '죽음'을 망각하고, 일부러 고개를 가로 저으며 잊으려하고, 마치 대단히 부정적인 무엇처럼 여긴다.

참으로, 어리석고, 멍청하다.



삶과 죽음은 반대어가 아니라, 같은 것이라는 걸 전혀 이해 끝자락도 못하는 것이다.



태어났기에 죽음이 있는것이다.

우리는 태어났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렇게 태어났음에도 죽음은 두려워하고 거부하는 건 무엇인가?

담배는 그렇게 피어대면서 폐암은 두려워하는 꼴이 아니고 뭘까.

이 얼마나 우스운가. 


삶 안에 죽음이 있다.

우리가 살아간다는 건 사실, 죽어간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니까 함부로,

"그럴거면 왜 살아? 어차피 죽을건데?"

라는 무식한 말로 자기 자신을 기만하고 속이지 말자.

당당히 죽음을 마주한채,

"오늘 내가 죽는다면 과연 이 일들을 할까?" 라며 스스로, 죽음을 자각하고 이를 토대로 진짜 제대로 된 지혜로운 삶을 살아보시라.


당신과 나는

지금 엄청나게 수승한 지혜를 방금 쓰고, 당신은 그걸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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